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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2019] ④ 광고 속 그 목소리, 제이 슬로우가 전하는 '끌어당김의 법칙'

최종수정 : 2018-12-26 15:54:28

춤, 영화, 랩, 성우. 제이 슬로우가 하나씩 끌어당긴 경험들은 광고 출연 제의로 가득한 그물이 되어 돌아왔다. 제이 슬로우라는 예명은 2012년 28살의 나이로 데뷔한 그가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꾸준히 이 길을 걷겠다 는 다짐을 담아 지었다. 제이 슬로우
▲ 춤, 영화, 랩, 성우. 제이 슬로우가 하나씩 끌어당긴 경험들은 광고 출연 제의로 가득한 그물이 되어 돌아왔다. 제이 슬로우라는 예명은 2012년 28살의 나이로 데뷔한 그가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꾸준히 이 길을 걷겠다'는 다짐을 담아 지었다./제이 슬로우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s)'의 팬이라면 올해 초 시즌 예고 영상의 강렬한 랩을 기억할 것이다. "모든 게 무너져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누구나 레전드야." 유튜브에서 13만2600여회 재생된 이 노랫말을 자기 이야기로 만든 래퍼 '제이 슬로우(J.Slow·본명 방정문)'는 요즘 광고 녹음 일정으로 쉴틈 없는 연말을 보내고 있다. 출연한 광고만 현재까지 100여편에 이른다. 속도보다 심지를 강조하는 가사를 써온 그가 광고계의 총아로 거듭난 과정을 듣기 위해, 지난 17일 평촌역 인근 카페로 향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홈 을 계기로 무대와 연을 맺은 제이 슬로우는 지금까지 싱글과 EP 약 5곡 분량 를 합쳐 16장의 앨범을 냈다. 사진은 2014년 홍대 인근 클럽에서 공연하는 모습. 요즘은 광고 녹음 일정 때문에 무대에 오를 시간이 없다. 제이 슬로우
▲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홈'을 계기로 무대와 연을 맺은 제이 슬로우는 지금까지 싱글과 EP(약 5곡 분량)를 합쳐 16장의 앨범을 냈다. 사진은 2014년 홍대 인근 클럽에서 공연하는 모습. 요즘은 광고 녹음 일정 때문에 무대에 오를 시간이 없다./제이 슬로우

◆비트를 꿈꾼 팔방미인

소심한 10대 소년이 세상에 말을 건 방법은 춤이었다. 1995년 10월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표한 '컴백홈'은 전국 초등학생의 학예회 장기자랑 1순위로 떠올랐다. 뚱뚱하고 내성적인 5학년 정문도 그중 한 명이었다. "호기심에 세 명이 팀을 짰는데, 마스크를 쓰면 자신감이 붙어서 이주노 역할을 맡았어요. 12월 공연 직후 친구들이 저를 다르게 보더군요. 이때부터 성격이 외향적으로 변했습니다."

6학년 때는 H.O.T와 젝스키스, 중학생이 되면서 신화 춤을 추었다. 만화 '힙합'의 인기로 중학교 복도가 온통 춤 연습실이 되던 때였다. 정문은 적게는 5명, 많게는 10명을 모아 복도를 가로질렀다. 2학년 때는 학교에서 유일하게 토마스(원심력을 이용한 회전 동작) 세 바퀴 도는 친구를 찾아가 배우기도 했다. 당연히 고등학교에서도 춤만 출 줄 알았다.

하지만 춤은 음악을 틀고 춘다. 백운고등학교 댄스 동아리에 들어간 정문은 랩 동아리와의 합동 공연 연습으로 전환점을 맞았다. "랩 하는 친구 셋이 라임에 맞춰 가사 쓰는 모습에 매료됐어요. 사랑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컸지요. 이 친구들과 노래방에 다녀온 뒤 가입 권유를 받고 오디션을 봤는데 반응이 좋았죠. 저희 학교 4인조 랩 그룹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예명은 이름의 앞글자를 딴 JM이었다.

그날부터 JM의 파나소닉 CD 플레이어는 선배들이 빌려준 각종 음반을 쉴새 없이 돌려댔다. 들으면 들을수록 신세계가 펼쳐졌다. 미국 느낌 충만한 드렁큰 타이거, 마초같은 CB 매스, 특히 나스와 우탱 클랜 같은 미국 래퍼는 설명이 필요없었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압구정동 상아레코드에서 명반 수집에 나섰다. 펑퍼짐한 힙합 바지에 큰 신발을 끌고 삭발머리를 두리번거렸다.

유튜브 없던 이 시절의 힙합 교재는 밀레니얼 세대의 마지막 아날로그, 비디오 테이프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음악 채널에서 '힙합 더 바이브'를 녹화했어요. 힙합의 본고장인 미국 음악과 패션 경향을 배울 수 있었죠."

한 가지에 몰두해도 바쁜 시기에, JM이 빠져든 또 다른 분야는 연기였다. 중학교 시절에는 캠코더로 학교물 '왕따'를 만들었지만, 일진 역할로 섭외한 실제 일진 학생들이 잘 나타나지 않아 시나리오를 고치다 내용이 산으로 갔다. 영화 '비트'를 따라 만든 작품도 흐지부지됐다. 고등학생이 되어 완성한 이 영화는 3학년 2학기에 인문계에서 예체능으로 진로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1 때 싸구려 마이크로 10여곡을 녹음해 공CD에 구운 뒤 '하두리'로 찍은 사진을 앨범아트로 썼습니다. 그렇게 만든 CD 50장을 친구들에게 나눠줬어요. 점심 시간에는 방송실에서 제 노래를 틀어주기도 했지요. 여기에 영화도 만들어서 보여드리니, 부모님께서 저의 진심을 알아주셨죠." 입시에 실패하면 인문계로 재수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제이 슬로우는 일반 광고보다 랩이 들어가는 작업을 더 좋아하느냐 는 질문에 오히려 힘들다 고 답했다. 절대 못 들어가는 리듬에 가사를 넣어야 하는 상황이 난감하죠. 그 한계 안에서 수정하는 과정이 어려운 편입니다. 하지만 연극영화과 전공을 살려 어린 시절 못했던 성우를 하게 됐으니,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하고 싶어요. 제이 슬로우
▲ 제이 슬로우는 '일반 광고보다 랩이 들어가는 작업을 더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힘들다"고 답했다. "절대 못 들어가는 리듬에 가사를 넣어야 하는 상황이 난감하죠. 그 한계 안에서 수정하는 과정이 어려운 편입니다. 하지만 연극영화과 전공을 살려 어린 시절 못했던 성우를 하게 됐으니,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하고 싶어요."/제이 슬로우

◆"조급하지 말자" 예명으로 다짐

안양예고 친구들의 대본을 빌려 연기연습과 수능공부에 매달린 그는, 2003년 동아방송예술대 입학에 성공했다. 연기와 춤, 랩도 하는 양동근을 본보기로 삼았다. 하지만 지도교수였던 성우 손종환 씨의 권유로 졸업 후 1년간 KBS 성우 공채를 준비했다가 쓴잔을 마셨다. "졸업 전에 연극을 전공한 친구와 재미삼아 KBS 성우시험에 찾아갔는데, 그 친구는 한번에 3차까지 붙어서 지금 성우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후 1년 준비했는데 또 떨어졌지요. 성우는 재밌는 직업이지만, 무대 체질인 저와는 맞지 않다고 느끼기도 해서 교수님 학원을 나왔습니다."

성우 학원을 그만 둔 때는 찬바람이 불던 2008년 초.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고등학교 랩 동아리 친구들은 평범한 직장인의 길을 택했다. 강남의 한 클럽에서 만난 형과 13곡을 만들었지만, 그마저 취업의 길로 들어섰다. 그렇게 또 1년이 흘렀다.

제이 슬로우도 어린 시절 힙찔이 힙합 우월주의자 였던 적이 있다고 한다. 힙합 말고는 다른 장르를 인정하지 않는 시기는 누구나 거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래퍼라면 절대 노래를 부르거나 사랑에 관한 가사를 쓰면 안 되고, 율동 역시 마찬가지라는 꼰대같은 시대였죠. 결국 제가 달라졌다기 보다는, 힙합 문화가 변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요. 제이 슬로우
▲ 제이 슬로우도 어린 시절 '힙찔이(힙합 우월주의자)'였던 적이 있다고 한다. "힙합 말고는 다른 장르를 인정하지 않는 시기는 누구나 거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래퍼라면 절대 노래를 부르거나 사랑에 관한 가사를 쓰면 안 되고, 율동 역시 마찬가지라는 꼰대같은 시대였죠. 결국 제가 달라졌다기 보다는, 힙합 문화가 변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요."/제이 슬로우

2010년부터 중소 연예기획사 연습생들에게 랩을 가르치던 JM은 2012년 첫 싱글 앨범 'Break it down'을 냈다. 고등학교 때부터 쓰던 예명은 발라드 가수와 기획사 이름으로 유명해져, 제이 슬로우로 바꿨다. "같이 음악하는 형이 어느날 '너 앨범도 드럽게 안 나오는데 슬로우로 하라'고 농을 치더군요. 뭔가 귀에 보들보들 꽂히기도 하고, 우리집 가훈인 근근화완(勤謹和緩·부지런하되, 조급하지 말자)과도 들어맞았지요.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꾸준히 이 길을 걷겠다는 다짐이기도 하죠."

거북이의 무기는 등껍질이 아닌 꾸준함이었다. 2010년 한 회사의 사내방송에서 드라마 '추노' 성대모사를 했는데, 이후 '뿌리깊은 나무' 성대모사도 주목받아 2012년 서울영상광고제에 소개됐다. 이후 대학 힙합 동아리 선배의 제의로 2014년 LG 탭북 광고의 랩을 녹음했다. 가사 전달력을 위해 발음에 신경 쓰던 그를 눈여겨 봤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주변의 권유로 나간 '쇼 미 더 머니' 시즌 3에서 자신이 동경하던 양동근의 격려를 받기도 했다. "패자부활전에서 방송에는 나오지 않은 조언을 들었습니다. '나는 힙합에 지쳐 있었는데, 제이 슬로우를 보고 감명 받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해 가을 대전 지역 대학 공연에 나갔는데, 바로 다음 순서가 그 분이더군요. '잘 했어' 한 마디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2014년에도 음반 시장의 반응은 뜨겁지 않았고, 앨범은 계속 내고 싶었다. 제이 슬로우는 연말에 회사를 떠나 혼자 곡을 만들기로 했다. 긍정의 힘을 담은 2017년작 '오예'에는 그런 고민의 흔적이 역력하다. 가슴에 긍정의 씨앗을 심으면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이다.

제이 슬로우가 지난해 여름 오른쪽 다리에 문신한 닌자 거북이 라파엘. 이번에 그가 녹음한 닌자 거북이 새 시즌의 주인공도 라파엘이다. 제이 슬로우가 끌어당김의 법칙을 믿는 이유다. 제이 슬로우
▲ 제이 슬로우가 지난해 여름 오른쪽 다리에 문신한 '닌자 거북이' 라파엘. 이번에 그가 녹음한 닌자 거북이 새 시즌의 주인공도 라파엘이다. 제이 슬로우가 끌어당김의 법칙을 믿는 이유다./제이 슬로우

◆불필요한 경험? '긍정의 씨앗'이었다

제이 슬로우가 춤과 연기, 랩을 끌어당긴 결과는 일거리 가득한 그물이었다. 2016년 말 작업한 현대카드 광고는 업계에 그의 매력을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였다. 카드의 방향을 세로로 바꿨다는 이 광고 이후, 그의 일거리 그래프도 수직으로 껑충 뛰었다. "2017년 초에 텔레비전에서 제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는데, 일주일 뒤 전화가 와요. '제이 슬로우 맞으세요?' 이때부터 일이 쏟아졌습니다." '마이크가 좋아하는 목소리'라는 지도교수의 평가는 사실이었다.

그가 목소리 출연한 광고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합쳐 100여편에 이른다. 올 연말도 광고 녹음 일정이 끊이지 않아 무대에 오르지 못할 정도다. 자신의 노랫말인 '끌어당김의 법칙'이 현실이 된 것이다. "예전에는 곧바로 성과가 나오지 않은 시간을 아까워했어요. 성우 학원에 가지 않았다면 1년을 벌었을텐데. 그 형과 13곡 작업을 안 했으면 또 1년 버는건데 하고요.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때의 경험들이 저의 무기가 되었어요. 예전에 배워둔 성우의 발성법을 몸이 기억하더군요. 성우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면, 현대카드 광고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겠죠." 그는 올해 BMW 자동차를 스스로에게 선물한다는 다짐을 생일에 지킬 수 있었다. 내년 목표는 롤렉스 시계다. 친구들에게 내뱉은 말을 지키려고 열심히 일하다 보니, 끌어당김의 법칙이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제이 슬로우는 친구들 앞에서 한 선언을 지키려는 노력이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생일에 BMW 4 시리즈를 스스로 선물하겠다고 말 하곤 했는데, 차가 정말 그날 출고됐습니다. 시간 따지지 않고 열심히 녹음실로 달려간 결과죠. 제이 슬로우
▲ 제이 슬로우는 친구들 앞에서 한 선언을 지키려는 노력이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생일에 BMW 4 시리즈를 스스로 선물하겠다고 말 하곤 했는데, 차가 정말 그날 출고됐습니다. 시간 따지지 않고 열심히 녹음실로 달려간 결과죠."/제이 슬로우

아직은 본업보다 광고로 유명한 점이 아쉽지 않을까. "힙찔이 시절에는 무조건 랩으로 성공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성공이라는 개념이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매 순간 내가 즐기면서 제일 잘 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물론 아직도 마음 속엔 힙합이 살아있습니다. 곡 작업도 계속하고 있고요."

끌어당김의 법칙은 지금도 이어진다. 지난해 여름 오른쪽 다리에 '닌자 거북이' 라파엘 문신을 했는데, 최근 이 만화영화의 주제곡을 녹음했다. 이번 시즌의 주인공 역시 라파엘이라고 한다. 첫 방송은 1월 중순이다. "제 노래 '오예' 가사처럼, 부정적인 생각에 억지로 손바닥 내밀 필요는 없습니다. 때론 넘어질 겁니다. 오늘이 흑역사가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도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사실은 긍정의 씨앗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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